[뉴스인김기석 = 1999년 초여름 평양의 김일성대학 창설 주역인 박일 전 부총장을 선생을 서울서 만나 뵈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선생과 소통하려 했으나 다 실패 하였다. 그러던 지난 6 월에 카자흐스탄의 이웃 나라인 아제르바이젠에서 열린 유엔 회의에 초청받았다. 회의만큼 그 이상 필자에게 중요한 일은 선생의 족적을 찾는 것이다. 알마티 시를 방문하여 고려일보를 찾았다. 편집장이 선생 기사가 난 신문을 보여 주었다. 마침 선생의 일대기 기사가 있어 선생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기사는 “박일은 가장 특출 난 고려인 중의 한 분”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였다.” 짧지만 선생을 가장 간결 명료하게 요약한 글이다. 필자가 더욱 놀란 사실은 기사의 대부분은 선생이 자신 생각이나 의지와 달리 일찍 평양을 떠나는 고향으로 오게 된 사건에 대한 서술이다.  

이 사건은 필자가 가장 궁금해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김대 부총장으로 파견 근무하면서 선생은 평양 당국자 그리고 소련 군정 민사부 간부와 같이 일하였다. 이것은 예상과 달리 순탄치 안았다. 기사에는 선생이 평양정권과 소련군정과 “직접적 또는 숨은 저항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라 서술하였다. 기사를 읽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고려인 최고의 맑스 레닌주의 철학과 사상을 가르칠 수 있는 세계적 지성인이 서울 방문 중에 보여준 매우 특별한 언행이었다. 평양 파견 목적도 정권 책임자인 김일성과 그 부하에게 맑스 레닌 사상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4 일간의 행적과 언행은 맑스 레닌 철학의 대가라기보다 투철하고 올곧은 민족주의 사상의 대가였다.

김일성대학 인사기록 철도 있었으며 거기서 선생의 자필 이력서를 발견하였다. 러시아 정부의 파견이라, 다른 교수와 달리 자서전 (당을 위한 투쟁 경력)은 첨부되지 않았다. 이력서에는 1926년 소련 교육을 받기 전인 1924-26년 3 년 동안 간도 용정시 동흥중학을 다녔다고 적었다. 이 학교는 1921년 천도교가 설립하였다. 운영 경비도 주로 용정시와 국내의 천도교 신도나 반일 유지인사가 조달하였다. 1922년에 학교 내에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인 광명회가 조직되어 맑스 레닌 사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나타났다. 24년 7월경 진보적 사상을 가진 교사가 단체를 조직하여 학교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선도 아래 27년 5월 1일에 용정 등지에서 수천 명 학생과 군중이 모여 시위 행진을 하며 메이데이를 기념하기도 하였다.선생에 대한 필자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관심은 1946년 여름 남에는 서울대학이 북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이 등장하는 과정을 연구하면서부터 생겼다. 당시 김대 창설관련 일차 자료(원 자료)는 평양에는 없고 미국에 있다. 필자에게는 오히려 큰 행운 이었다 미국에 있는 기록은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의 내락과 중공의 권유를 받아 일으킨 북한의 6.25 남침 전쟁에서 김일성은 승리하지 못하였다. 한 때 평양까지 유엔군에 점령당하였다. 다른 나라는 잘 모르나, 미국의 전쟁 행위 특징은 총이나 대포를 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2011년 5월 파키스탄에 숨어 있는 빈라덴 습격에서처럼 인명살상과 동시에 그가 숨었던 건물에서 남아 있었던 온갖 자료, 컴퓨터, 비디오, 문서 등 가져 올만큼 다 가져갔다. 평양 점령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수상 등 각료의 사무실과 정부 청사는 물론 점령지 지방 인민위 사무실 안에 있던 각종 문서를 가져갔다. 이 기록은 동경을 거쳐 배편으로 모두 미국으로 가져갔다. 이를 북한노획기록 (Captured Korean records)이라 하여 현재 국립기록관(National Archives)에 보관 중이다.

간도지역 청년 독립운동의 근거지에 3 년 기초교육을 마친 다음에야 러시아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40년 레닌그라드 교육학원을 졸업하였고, 졸업 후 6 년 간 국립종합대학에서 철학교수로 봉사하다 1946년 평양으로 파견되었다. 소 군정 감시하에 북한 노동당이 평양에 인민공화국을 설립하였으나 정치 지도자들은 실상 맑스 레닌 사상을 잘 모르는 상태였다. 이들의 사상무장을 위해 고려인 중 최고 철학자를 대학의 부총장 (나중에 대학원장 겸무)으로 임명하고 학교 건설의 실질 권한을 주었다.

선생은 서울대학교 초청 특별 강연에서 러시아 정부가 김대에 파견한 경위를 아래와 같이 증언 하였다.

“1946년 9 월말인데, 알마타 종합대학에서 강습이 있었어요. 내가 철학사 강의를 하는데, 교사 한 사람이 들어와서 ‘총장님이 박일 선생을 부른다. 갑시다.’ 당시 총장은 러시아 사람이었다.

총장이 러시아말로 물었어요. ‘당신이 고려 말을 안다는 것이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그 때에 공화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떡 내놓고 나한테 ‘이거 고려말로 읽고 러시아말로 번역해라.’ 시험치는 게죠.

그래서 해 보이니까, ‘아 다 되었다.’

총장이 하는 말이, ‘모스크바 소련 중앙당 간부 셋이 이야기해서 너를 평양에다가 파견한다’ ‘제가 무슨 잘못 행사를 했기 때문에 나를 카자흐스탄에서 그 곳으로 보냅니까?’

‘아니, 그러지 말고 좋아해라. 너를 평양에 해방된 북조선의 서울인 평양에 보내 민족 종합대학을 설립한다. 그러니까 가 그쪽에서 대학을 만들어라.’

그래서 파견을 받아 가지고, 모스크바에서 한 달 동안 교시를 받았습니다. 조선에 가서 어떻게 내 할 바를 알고, 김일성 만세를 어떻게 불러야 하고, 조선을 해방시킨 소련군 만세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 지 연습을 한 달 동안 했지요. 그것이 어느 땐고 하니, 약 1946년 11월입니다. 기념행사가 있었고, 야외에서, 그때에 처음 내가 한국말로 10월 혁명의 역사적 의의라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제가 평양에 가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파견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까, 일제시대에서는 서울대학은 있었지만, 종합대학은 없었거든. 평양에는 조그만 고등전문학교인 숭실농업 전문학교가 있었어요.(필자 주: 기독교 전문학교) 이 학교는 그 때 소련을 반대하는 정책을 가진 기관이었기 때문에, 소련과 우방들이 학교 사람들을 모두 쫓아 내 보내고, 일제 시대에 수천 명의 일본 군대가 살고 있던 지하실에다가 학생들을 앉히고, 강의실을 만들어 거기다 대학을 열었습니다. 그것이 어느 땐가 하니, 1946년 11월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대학이 시작되었고, 그 때 대학생이 사천 명이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부총장인데 소련군관들이 시키는 데로 심부름을 하지 않았지요.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 고 하니, 평양에다 세울 조선종합대학은 민족적 성질을 가져야 한다. 일단 조선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과가 있어야지. 조선의 철학, 사상을 연구하는 철학과가 있어야지 하면서 이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내가 실지로 총장 일을 하면서 왜 부총장이어야 했는가? 그때는 북선에 명성이 높은 학자가 없었습니다. 학계에 그 때 명성이 높은 분은 김두봉 선생님입니다. 1950년에 북선 노동당 당원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분이지요. 그 역사 아십니까?

"저는 낮이면 김두봉 선생님께 가서 거처를 하며 한글을 배우고, 밤이면 소련 군관 몇몇 의지해서, 두 김씨를 앉혀놓고, 김일성이 이쪽에 앉고 김두봉이 이쪽에 앉고, 맑스 레닌주의 철학 사상을 제가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한 해 반 동안이었다."

김대와 다른 대학의 교원 자필 이력서와 자서전을 분석하여 필자는 1996년 김일성 대학의 등장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김대 이력서 철을 살펴 보면 대학 설립 후 남에서 특히 서울대학에서 유능한 교수가 많았다. 이들 자서전에는 1946년 국립서울대 창설 초기에 미군정 당국 한국인 군정청 교육국 책임자와 심한 마찰이 있었고 서울대 설립 반대 투쟁으로 처벌을 당하였다. 1950년 전쟁 발발 후에도 여러 서울대 교수가 북으로 갔다. 가장 유명한 이는 화공학 전공 이승기 공대 학장이 있다. 그는 김대 공학부 학장으로 일하였다. 비날론을 개발하여 남한보다 일찍 합성 섬유를 널리 보급하였다. 그는 한국으로 오지 않고 교오또 대학에 남아서 연구를 계속했다면 노벨상도 탈 수 있는 정도의 실력자이다.

필자는 이듬해 서울대 창설 연구 논문을 발표 하였다. 나중에 서로 경쟁을 하며 같은 시기 두 달 간격으로 창설된 두 대학을 “일란성 쌍생아”라는 비유를 써서 비교 검토한 연구 단행본도 간행하였다. 러시아에 파견 온 고려인 학자나 교수, 미국에 살던 교포 교수와 학자가 각각 두 대학 창설을 크게 도왔다.  대학 창설 과정에는 특이한 것은 고려인이나 미국서 동부한 지도자 모두 미소 군정청 관리보다 앞서 민족의 지성 양성에 앞장 서 일했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박일 선생의 생애와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99년에 초 여름 신문 보다 선생의 서울 방문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외동포재단이 뽑은 “역사 속의 한국인: 고난사 증언” 의 한 분으로 카자흐에서 오신 것이다. 필자는 그 당시 서울대에서 대학기록관(University Archives)을 창설 준비하고 있었으며 구술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분의 구술기록을 모으려고 대학으로 공식 초청 강연행사를 신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3 박 4일 동안 학교 최고 시설인 호암 교수회관의 영빈관에 모셨다. 마침 같이 온 인민 배우 이함덕 선생도 게시어 행사에 모셨다. 6월 19일 서울대에서 “김일성대학의 창설”에 대하여 공개 강연을 하였다.

강연 모습.

또 비공개 구술 기록 수집 인터뷰도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해방직후 북한 상황이었고, 다른 한 번은 고려인과 다른 민족간의 갈등에 대한 것이다.

대학원 학생들과 단체 사진 촬영 모습.

행사 중 선생이 특별히 필자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10여년 후 왕래가 자유로우면 평양에 가서 철학과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싶다고 하였다. 못 가면 여기서 강의를 할 것이니 비디오로 촬영을 하였다가 우리가 대신 가서 이를 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학교 비디오 시설을 이용하여 촬영을 하였다. 그런데 강연 주제가 상당히 의외였다. “천부경과 조선철학”이었다. 선생의 뜻이 매우 진지하고 간곡하여 있는 그대로를 다 녹화하였다. 맑스 레인의 세계적 학자가 김일성 대학 철학과 학생들에게 유훈처럼 남길 강의는 당연히 맑스 레닌 사상의 미래와 젊은이의 책임이라 생각하였으나 전혀 달랐다.

천부경은 천도교 경전의 하나이다.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천하만민을 교화하려는 자생 민족 종교 경전의 하나이다. 확언하건대, 김대 대학 당국이 이 비디오 상연을 허가해 줄 리는 없다. 주체사상이 거의 종교로 정착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강감찬 장군 영정에 인사드리는 모습.
낙성대를 찾은 시민과 담소나누는 모습.
낙성대 강감찬 장군 사당에서 촬영 모습.

몇 군데 역사유적지를 방문하였다. 선생은 낙성대 강감찬 장군 사당을 꼭 가시겠다 하여 뫼셨다. 관리소에 선생이 어떤 인물인지 알리자 책임자가 영광이라며 대담히 사당 문을 열어 영정을 보여 주었다. 제사는 못 모셨었으나 큰 절로 예의를 표하였다.

규장각 방문 모습.

학내 세계 문화유적지는 규장각인 바 여기도 자세히 살펴 보았다. 필자와 제자들은 예상 밖의 귀한 선물을 받았다.

원사증.

소련 최고 최상의 지성만이 회원을 되는 과학학술원에서 받은 최상 학위인 원사임을 증명하는 원사증이다. 우린 너무 귀하여 이를 서울대기록관에 기증하여 영구 보존하기로 하였다.

선생은 철두철미한 민족 지성의 최고 위치에 있는 분이다. 부총장이라 직을 수락한 것은 평양에 최고 민족지성 양성 기관을 만들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소련이나 북한 정권 담당자에 협력하였다. 호락호락 시키는 일을 할 분이 넘는 분이다. 당시 누구도 상상도 못한 조선의 역사 철학을 완성하는 최고 고등교육기관을 만들려 했다. 대종교 신자가 아니나, 천부경의 철학과사상과 원리를 마음 속에 담고 있었을 것이다. 짐작 하건대, 그의 깊은 흉중에 자리한 민족 사랑이 북한 정권이나 소련 군정 측에 알려졌다면 그들과 같이 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선생에게 원하는 것은 꼭두각시이거나 권력에 잘 순치된 철학교수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 선생은 1 년 반 만에 고 알마티로 갈수 밖에 없었다. 필자의 이런 논리적 추리를 사실로 확인하려 했으나 다시 여쭈어 볼 기회를 놓쳤다.

필자가 기증한 박일 선생 관련 기록 전체는 서울대학교 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글 : 김기석(국경없는교육가회 대표, 전 서울대학교 기록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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