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없는 교육가회가 바라본 아프리카

*아프리카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굶주림과 질병,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검은 대륙, 혹은 해외여행기를 담은 TV 프로그램 속 이국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교육개발협력사업을 수행해온 국경없는 교육가회(EWB, Educators Without Borders) 구성원들이 몸소 겪고 느낀 다채로운 아프리카 이야기를 뉴스인에서 연재합니다. EWB는 지난 2007년 개발도상국 교육권 확대를 위해 설립된 비정부단체입니다. -편집자주

와가두구 프랑스 문화원 전시실. 부르키나파소 출신 작가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사진=양진모)

[뉴스인] 양진모 = 부르키나파소에는 프랑스 흔적이 깊게 배어 있다. 부르키나파소의 공식어가 프랑스어인 건 기본이고, Total 정유소, Orange 통신사, Société Géneralle 은행 등 수도 와가두구 시내에는 프랑스 기업들이 즐비하다.

얼마 전에는 식당에서 TV뉴스를 시청하는데, 지하디스트 소탕훈련의 지휘 장교가 프랑스인이었다. 최근 부르키나파소 북부에서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늘어 군사훈련이 급증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이곳은 프랑스군이 주둔해 있는 아프리카 11개국 중 하나다. 와가두구 시내 최고의 문화공간이 프랑스 문화원(Institut Français)일 정도이니, 이곳에서의 프랑스의 위용은 알 만하다.

부르키나파소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프랑스의 엄청난 영향력은 부르키나파소의 근대사에 근간을 두고 있다. 1884년 유럽의 아프리카 땅따먹기 프로젝트인 베를린 회의는 부르키나파소의 운명을 프랑스 휘하로 밀어 넣었다.

이후 1896년 모시족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와가두구 왕국이 프랑스군에 항복하면서 부르키나파소 영토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식민지로 편성되기에 이른다. 65년간 프랑스 특유의 ‘동화주의 정책’으로 현지 주민을 프랑스화시키려 하면서 부르키나파소의 다양한 부족 언어, 문화, 풍습은 장기간 억압당하고 잊히게 된다.

1960년 독립 이후에도 초대 대통령인 모리스 야메오고는 프랑스와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1987년 쿠데타로 집권한 블레즈 콩파오레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정치적 지지를 받기까지 했다. 그는 2015년까지 총 28년 간 집권했는데, 장기집권 기간 프랑스 기업들이 부르키나파소에서 취한 이익은 상당하다.

이처럼 사회, 정치, 문화 등 다방면에서 장기간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기에 프랑스는 부르키나파소의 떼어낼 수 없는 일부가 되어 버렸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처럼, 프랑스 제국주의 시절의 기억과 영향은 염치불문하고 부르키나파소의 오늘날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입장을 바꿔 만약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5000만 국민은 모두 일본어로 소통이 가능할 것이고, 대통령은 일본총리의 지지가 없다면 당선되지 못할 것이다.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조선의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던 일본군은 당당히 서울시내 한복판에 군사기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치자. 이게 프랑스가 떵떵거리고 있는 오늘날 부르키나파소의 슬픈 자화상이다.

나는 프랑스에 철저히 의존해 있는 부르키나파소의 앙상한 모습이 순전히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욕망 탓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열적인 부족사회, 부족한 자원, 해외직접투자의 결여, 과도한 원조의존현상 등 다양한 요소들이 이러한 현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100년이 넘는 동안 프랑스의 눈치만 살핀 부르키나파소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루라도 빨리 부르키나파소가 제 발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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